나이키 축구를 세계 무대로 이끈 4년


-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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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14일, 브라질과 이탈리아는 축구계에서 가장 탐나는 트로피를 위해 경기를 펼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날, 로즈볼의 기온은 섭씨 26.7도를 넘어섰습니다. 두 팀이 터널 밖으로 걸어 나온 순간 관중석에는 9만 4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고,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 명이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죠.
그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 풋웨어 회사의 공동 창업자이자 CEO인 필 나이트도 있었습니다. 사실 나이키는 이미 러닝과 농구의 판도를 바꿔 놓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던 축구는 스포츠와 문화 양면에서 여전히 거대한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죠.
경기를 보고 있던 나이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점수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이키 티엠포를 신고 있던 브라질 선수 8명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특별한 매력을 경기 속에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매력을 조가 보니토로 부릅니다. 포르투갈어로 ‘아름답게 플레이하라’라는 뜻으로, 표현적이고, 창의적이며, 즐겁고, 예측할 수 없는 플레이스타일을 말하죠.
이틀 후, 나이트는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 디렉터를 따로 불러 나이키와 축구의 관계를 영원히 바꿔 놓을 세 마디를 건넸습니다.
“저는 브라질을 원합니다.”

1994년 축구 대회에 출전한 브라질 국가대표팀. 모든 것을 바꿔 놓을 순간이었습니다.

로즈볼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브라질 스트라이커 호마리우. 그는 이날 나이키 티엠포를 신고 경기에 나선 브라질 선수 8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변곡점이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1994년 여름의 나이키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리건주 비버턴의 나이키 본사에서는 당시에도 축구를 여전히 ‘Soccer’라고 불렀습니다. 축구는 수년간 회사 내에서 우선순위가 높지 않은 분야로 남아 있었죠. 물론 축구화도 있었습니다. 선수와 팀을 지원하기도 했고,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죠. 그러나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축구계에서 나이키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내부 관계자에게 축구는 사실상 뒷전에 두는 사업에 불과했죠.
“우리는 축구계에서 정말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나이키 축구의 첫 총괄 매니저였던 샌디 보데커는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곧 이 상황을 바꿔 놓게 됩니다.
1990년 초, 보데커는 나이키 풋웨어 R&D 부문에서 두터운 신뢰를 받는 선구자적 인물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나이키의 핵심 인재로 거듭나 나이키 SB 및 나이키의 Breaking2 문샷을 이끌게 됩니다. 수년 동안 보데커와 그의 몇몇 동료는 나이키가 축구라는 스포츠를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까지만 해도, 이를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려는 분위기는 없었죠. 1994년 결승전 이후 나이트의 지시가 내려오자, 보데커는 마침내 행동에 나설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이키 축구는 독립 부문으로 출범하게 되었고, 보데커가 이를 이끌게 되었죠.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바로 1998년 프랑스에서 토너먼트가 열릴 때까지 축구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 목표를 이루기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축구계에서 새로운 헤리티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오히려 그 점이 좋았죠. 우리는 기존의 헤리티지가 없었으니까요.”
샌디 보데커, 나이키 축구 첫 총괄 매니저
이후 의류 디렉터, 의류 개발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스포츠 마케팅 리드와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 디렉터 등으로 구성된 소수 정예 핵심 팀이 꾸려졌습니다. 팀은 한마음으로 뭉쳐 있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나이키는 축구에 내세울 만한 헤리티지가 없었습니다. 오리건주의 미국 기업이 세계인의 스포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냐는 유럽 축구계 관계자들의 회의적인 시선도 적지 않았죠.
하지만 보데커는 이를 다르게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회의적인 시선을 기꺼이 수용했죠. 축구계에서 쌓아온 전통이 없다는 점을 약점으로 보지 않았거든요. 그게 바로 핵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축구계의 새로운 헤리티지가 되길 원했습니다.” 보데커는 2018년 세상을 떠나기 전, Department of Nike Archives(DNA)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오히려 그 점이 좋았죠. 우리는 기존의 헤리티지가 없었으니까요.”
축구의 역사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역사를 충분히 이해한 후 그 너머로 나아가자는 의미였죠.
나이키 축구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하든, 성공은 축구의 역사를 존중하면서도 나이키만의 완전한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데 있었습니다.
팀은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미국 축구 연맹과의 계약 체결이었습니다. 미국 축구 연맹은 나이키의 본거지인 미국 시장에서 축구와 선수를 지원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줄 이상적인 파트너였기 때문이었죠. 수개월 동안 신뢰를 쌓은 끝에 나이키는 마침내 계약을 따냈습니다. 이 계약은 남녀 국가대표 프로그램 전체를 아울렀고, 미국 축구 연맹은 이를 통해 나이키의 주요 경쟁사였던 기존 스폰서와의 28년간의 파트너십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한 번의 계약으로 나이키는 미국 축구계 전반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선수들은 물론, 앞으로 훌륭한 선수가 될 유망주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죠. 선수들의 필요에 맞춘 혁신도 만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중 한 명인 미아 햄에게 나이키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계약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계약보다 더 큰 무언가를 약속하고 있었죠. “제가 더 깊게 관여하고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였어요.”라고 미아 햄은 말합니다.
비슷한 시기, 나이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훗날 한 세대에 걸쳐 여자 축구와 나이키를 상징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할 인물과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2년 전, 한 대담한 스포츠 마케팅 담당자가 미아 햄을 찾아왔습니다. 1992년 NCAA 챔피언십이 열린 비 내린 채플 힐에서,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의 스타 선수였던 그녀가 6분 만에 두 골을 터뜨리는 모습을 본 뒤였죠.
이 계약은 채플 힐의 램스 헤드 래스켈러 바 지하에서 성사되었습니다. 마케팅 담당자는 냅킨에 계약 내용을 휘갈겨 적은 뒤, 그 약속을 현실로 만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오리건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를 존중해준 것이 무엇보다 큰 차이를 만들었어요. 선수를 적극적으로 만들었죠. 개인으로서 무엇을 더 해낼 수 있을지 직접 도전해 보고 싶어지고요.”
미아 햄, 축구 월드 챔피언
미국 축구 연맹과 계약을 맺은 이후, 나이키는 여자 축구에 대한 지원 의지를 더욱 공식적인 형태로 이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나이키는 미아 햄과 미국 여자 대표팀을 진정한 컬래버레이터로 대했습니다. 선수들이 원하는 의류 핏을 직접 물었고, 여성의 발에 맞춘 축구화를 개발했으며, 여자 축구계가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선수들의 의견에 귀 기울였습니다.
“여자와 남자의 발의 차이점에 관해 많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어요.”라고 DNA와의 인터뷰에서 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축구화에 대해서도 저와 수없이 이야기를 나눴죠. 제가 어떤 점을 선호하는지, 다른 선수들은 무엇을 선호하는지 물어보면서요. 이렇게 우리를 존중해준 것이 무엇보다 큰 차이를 만들었어요. 선수를 적극적으로 만들었죠. 개인으로서 무엇을 더 해낼 수 있을지 직접 도전해 보고 싶어지고요.”
의류가 완성되어 돌아왔을 때, 선수들이 요청한 내용이 모두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햄에게 이 모든 과정은 스폰서십보다는 파트너십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팀 전체에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겼죠.
몇 년 후, 바 냅킨에 휘갈겨 쓴 계약으로 시작된 인연은 나이키 세계 본사 건물에 그녀의 이름을 딴 건물이 들어서며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연맹과 미아 햄의 계약이 완료되자, 새로운 부서는 모든 것의 시작이 된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이트가 브라질을 원한다고 말했으니, 이제 목표를 현실로 만들 차례였습니다.
치열한 노력이나 야심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었죠. 바로 인내심입니다. 브라질에서는 계약보다 관계 구축이 먼저였고, 나이키 팀은 그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2년 동안 그들은 브라질에 왜 나이키가 최적의 파트너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여러 번의 만남, 지속적인 연락, 무엇보다 경청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오직 하나의 흔들림 없는 목표에서 비롯된 순수하고도 끈질긴 집념을 발휘했죠.
1996년 7월, 이러한 노력은 빛을 발했습니다. 마침내 나이키 팀은 브라질의 모든 국가대표팀을 아우르는 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이는 당시 축구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계약이었습니다. 스우시에게 브라질의 정신은 나이키 축구가 추구하는 바를 정의했죠. 바로 창의적이고, 공격적이며, 본능적이고 즐거운 축구. 나이키는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축구를 지지하고 함께하고 있습니다.

1996년 7월, 나이키는 브라질 축구 연맹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당시 축구 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계약이었습니다. 브라질의 창의적이고 즐거운 축구 스타일은 나이키 축구를 상징하게 됐습니다.
계약 발표 당일, 나이키의 주가는 5% 하락했습니다. 시장은 검증되지 않은 영역에 뛰어든 나이키를 두고 갈피를 잡지 못했죠. 하지만 나이키 내부에서는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 브라질을 수없이 오가며 계약에 공을 들여온 팀은 자신들이 무엇을 얻어낸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거든요. “엄청난 추진력과 기대감을 안겨주는 계약이었죠” 보데커는 덧붙였습니다. “마치 뉴욕 양키스나 보스턴 셀틱스와 계약하는 것과 비슷했어요.” 주가는 결국 따라올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확신이 있었습니다. 계약서에 서명이 끝나자, 계약을 성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몇 명은 근처 바에 가 가장 비싼 코냑 한 병을 주문했죠. 공교롭게도 유럽 축구계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 두 명이 들어와 근처 자리에 앉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나이키의 최대 경쟁사 편에 있는 인물이었죠. 나이키 팀의 한 명이 그들을 바로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아야만 했어요.” 당시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 디렉터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사람들 귓가에 ‘우리가 방금 브라질과 계약했어요.’ 라고 속삭이고 싶었거든요.”
“스포츠를 넘어 대중문화로 스며들기 시작할 때, 나이키가 가장 잘하는 일이 드러납니다.”
1997년 나이키 축구 리드 팀원
브라질과의 계약만이 1996년을 역사적인 해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여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나이키가 축구에 쏟아온 투자가 스포츠계 최대 무대에서 빛을 발했거든요.
미아 햄, 브랜디 차스테인, 브리아나 스커리가 이끄는 미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첫 올림픽 여자 축구 결승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 경기는 미국에서 열린 여자 스포츠 경기 사상 최다 관중을 기록했습니다. 남자 축구에서는 1년 전 나이키와 계약을 맺은 나이지리아가 아르헨티나를 꺾고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나이키와 함께한 두 팀이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1996년은 나이키 축구가 창의적 정체성을 자리 잡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그해 4월, 나이키는 ‘“Good vs. Evil’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이 영상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 고대 튀니지 콜리세움 안, 불타는 경기장에서 악마의 팀과 맞붙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촬영은 약 16일 연속으로 진행됐고, 당시로는 기록적인 예산이 투입됐죠.
‘The Wall’ 같은 초기 광고가 축구계에 나이키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면, 이번 광고는 처음으로 전 세계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황금 시간대 송출이 금지되기도 했죠. 그럼에도 이 광고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영상 마지막 장면에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축구 선수로 손꼽히던 에릭 칸토나는 악마를 상대로 결승 골을 터뜨립니다. 카라를 세우고, 차갑게 한마디를 남기죠. “Au revoir(잘 가라)” 유럽 전역의 아이들은 뒷마당과 운동장에서 카라를 세우며 그 순간을 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광고 공개 한 달 후, 이 영상을 제작한 와이든+케네디(Wieden+Kennedy)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글렌 콜은 유럽에서 택시를 타게 됐습니다. 택시 기사는 글렌 콜이 광고 업계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TV에서 본 광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악마가 나오는 그 광고’ 말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매일 밤 자신을 뒷마당으로 불러내 마당 반대편에 세워 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악마 역할을 맡기고, 가슴을 향해 공을 차며 광고 속 악마가 폭발하는 장면을 재현하곤 했다고요.
“그때 이 광고가 정말 일반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는 걸 알게 됐어요.”라고 콜은 말합니다.
‘Good vs. Evil’이 축구계에 나이키의 독보적인 등장을 알렸다면, ‘Airport’는 나이키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컨셉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새롭게 계약을 맺은 브라질 축구대표팀이 비행기를 타기 전 시간을 보낼 때, 갑자기 터미널 곳곳에서 즉흥적으로 경기를 펼치는 게 다였죠. 악역은 없었습니다. 악마도 없었죠. 불타오르는 경기장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축구 선수들이 하는, 공을 차고 웃으며 브라질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팀으로 만든 특유의 즐거움을 드러내는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늘 성공의 비밀이라는 건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반대로 가는 곳에 있다고 생각했어요.”라고 콜은 말합니다. “아무도 ‘Good vs. Evil’을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 광고는 굉장히 어둡고 강렬했죠.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역발상은 통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만들어진 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촬영은 1997년 크리스마스와 새해 전야 사이, 존 우 감독의 지휘 아래 리우데자네이루 국제공항에서 진행됐습니다. 나이키는 터미널의 야간 운영을 마친 뒤, 촬영할 수 있도록 사전 허가를 받아 둔 상태였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나있었습니다. 선수들만 빼고요.
브라질에서 휴가를 보내던 국가대표팀은 4시간이나 늦게 도착했고, 촬영 장소의 특성상 현장 조율과 물류 진행이 꼬여만 갔습니다. 우 감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이었지만, 광고 촬영은 감독이 아니라 선수들의 일정에 맞춰 돌아가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 감독은 극심한 일사병까지 겪으며 촬영을 이어가고 있었죠.
나이키는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할리우드 프로듀서 로렌스 벤더를 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 혼란 속에서 탄생한 결과물은 나이키가 만들어왔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세계적인 스타를 캐스팅하거나 극적인 스토리라인을 내세우는 대신, ‘Airport’는 가장 브라질다운 브라질을 담아냈습니다. 짜인 각본 없이 활기차고 꾸밈없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이죠. 이는 나이키가 처음으로 개인이 아닌 팀을 중심으로 캠페인을 제작한 광고였습니다. 보데커는 이를 ‘전환점’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포츠를 넘어 대중문화로 스며들기 시작할 때, 나이키가 가장 잘하는 일이 드러납니다.” 나이키 축구 리드 팀원 중 한 명이 말합니다. “나이키가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던 스포츠였던 축구에서 그것을 해냈다는 건 정말 엄청난 성과였죠.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어요.”

1994년 공개된 두 편의 나이키 인쇄 광고에는 브라질 스트라이커 베베토와 프랑스 포워드 에릭 칸토나가 등장합니다. 이는 훗날 나이키 축구의 글로벌 확장을 실현하게 될 선수들과의 협업 관계를 보여주는 초기 사례를 보여줍니다.
광고가 전 세계적인 이목을 끌고 있을 무렵, 나이키는 이미 자신들의 주변에서 형성되고 있던 어떤 흐름을 하나의 언어로 정립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축구계에는 축구가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경기는 더 예측 가능해지고, 조심스러워지고, 활력이 떨어졌죠. 축구에 깊이 빠져 있던 프랑스인 피에르 로랑 보데이는 이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꼈습니다. 그는 나이키가 광고 활동을 이끌도록 영입한 인물이었습니다.
나이키가 그에게 축구에서 우리 브랜드가 무엇을 대표해야 하는지 정의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답을 찾기 위해 그는 유럽 전역의 학교와 축구 클럽을 다니며 아이들에게 축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물었죠. 수개월간의 대화를 통해 찾아낸 답은, 나이키가 막 계약을 맺은 팀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던 축구와도 맞닿아있었습니다. 바로 창의성, 즉흥성, 즐거움이 살아 있는, 두려움이 아닌 자유 속에서 펼쳐지는 축구였습니다.
“정의하기 쉽지 않았어요.” 보데는 말합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호나우두와 막 계약한 참이었고, 그는 최고의 스타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능 있고, 선구적이며, 열정이 넘치는 선수였어요. 경기에 다른 차원의 영혼을 불어넣고 있었죠.”
그들은 이걸 ‘훌륭한 축구(Brilliant Football)’로 불렀어요. ‘아름다운 경기’는 실제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철학이었습니다. 나이키 내부에서는 이 철학을 포르투갈어 한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alegria즉, ‘삶의 기쁨’이죠.”
브라질은 그 자체로 이 철학의 살아있는 실체였고, 이는 향후 10년간 나이키 축구가 나아갈 모든 행보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1997년 첫 번째 나이키 브라질 키트를 착용한 호나우두. 당시 나이키 글로벌 축구 브랜드 마케팅 리드였던 피에르 로랑의 말에 의하면, 그는 ‘다른 차원의 영혼’을 경기에 불어 넣었습니다.
1997년에 이르러 모든 계획이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팀과의 계약은 마무리됐고, 광고는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철학은 구체적인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이키가 필요한 건 모든 야망에 걸맞은 단 한 켤레의 축구화였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나이키는 더 구체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습니다. 유럽 엘리트 선수들이 기꺼이 신을 만한 축구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였죠. 그 해답은 돌로미티의 산맥 기슭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나이키가 축구 관련 계약을 추진하던 시기, 당시 이탈리아에 거주하던 마크 와슬리를 이탈리아 몬테벨루나의 한 시설로 보냈습니다. 몬테벨루나는 여러 세대에 걸쳐 유럽 제화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세계 스키 부츠의 제조 허브이자 여러 유명 축구 브랜드가 탄생한 장소이기도 했죠.
이곳의 운영 방식은 근본적으로 차별화된 장인정신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공장은 한 지붕 아래서 모든 공정을 처리하는 반면, 몬테벨루나에서는 각 부품을 전문 업체가 담당했습니다. 예를 들어 깔창만 생산하는 업체는 평생 그 한 가지 기술만 완벽하게 갈고닦아온 식이었죠. 이 파트너십의 결과로 탄생한 장인정신의 수준은 나이키의 축구화 개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몬테벨루나와의 협업이 진행될수록, 나이키는 새로운 도전에 나설 준비를 끝냈습니다.

나이키 머큐리얼 광고에 등장한 호나우두. 이 축구화는 그를 축구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선수 중 한 명으로 만든 폭발적인 가속력에 맞춰 설계되었습니다.
창의적 글쓰기로 학위를 받은 나이키 PLM 팀 스미스는 트랙 스파이크를 제거하고 축구 클리트를 달아 이를 축구화처럼 보이도록 스케치했습니다. 이 투박한 프로토타입이 머큐리얼의 토대가 됐습니다.
이 축구화는 호나우두를 중심에 두고 개발됐습니다. 특히 그의 경기 방식인 오랜 정적의 순간과 그 뒤를 잇는 폭발적인 가속에 적합하도록 설계됐습니다. 나이키는 유럽 7개국의 17세 이하 엘리트 축구 선수들에게 설문조사를 시행했습니다. 이는 그들 중 누구도 축구화 관련 계약을 맺은 적 없었기에 솔직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이 선수들의 답변이 그대로 개발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가장 중대한 결정은 갑피에서 내려졌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급 축구화는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인조 가죽 소재는 대개 저가 모조품에 사용되는 재료로 여겨졌습니다. 나이키는 일본 기업과 협력해 KNG-100이라는 인조 가죽을 개발했습니다. 이 인조 가죽은 물을 흡수하지 않고, 늘어나지 않으며, 당시 축구계에 있는 어떤 소재보다도 가볍고 얇았습니다. 여기에 이탈리아 레이싱 모터사이클 섀시에 사용되던 볼 컨트롤 코팅을 적용해 전례 없는 볼 터치 감각을 구현했습니다. 1.75mm의 플레이트는 당시 표준 두께의 거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죠.
나이키는 이 프로토타입을 브라질 국가대표팀에게 가져가면서, 지금까지 사용해 본 최고의 가죽이라며 설명했습니다. 물론 진짜 가죽이 아니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고요. 선수들은 이 축구화를 정말 마음에 들어 했고, 돌려주길 거부하기까지 했죠.

머큐리얼 프로토타입을 만들기 위해 나이티 PLM 팀 스미스는 트랙 스파이크를 제거하고 클리트를 달아 축구화처럼 보이도록 스케치했습니다. 가장 아이코닉한 축구화는 의외로 화려하지 않게 탄생했습니다.

블루, 옐로우, 크롬 컬러의 나이키 머큐리얼 SG는 1998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호나우두의 경기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축구계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본격적인 컬러 축구화였죠.
새로운 이 축구화의 이름을 붙일 때가 되자(내부적으로 ‘호나우두 울트라 스피드’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스미스와 팀원은 그리스 신화 책을 참고해 ‘울트라베록스(Ultravelox)’를 고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퇴근길에 운전 중이던 스미스의 머리에 ‘머큐리얼(Mercurial)’이 떠올랐습니다.
“여러 정의 중 하나가 ‘천성적으로 빠르게 변화한다’였는데 그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호나우두를 보면 경기장을 천천히 거닐고 있다가 최적의 순간에 공격에 나서거든요. 그 순간 그는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죠.”라고 스미스는 말합니다. “속도를 폭발적으로 올리죠.”
머큐리얼은 1998년 프랑스 에서 호나우두의 발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블루, 옐로우, 크롬 컬러로 완성된 이 축구화는 축구계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과감한 컬러 축구화였죠. “축구와 함께한 제 삶을 통틀어 완전히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순간을 회상하며 유럽 축구 마케팅 매니저인 데이브 데일리가 말합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누구도 본 적 없던 완전히 다른 축구화를 만들었어요. 정말 환상적이었죠. 이건 허황된 제품이 아니었습니다. 괴상하고, 엉뚱하고, 이상한 나이키식 아이디어도 아니었죠. 이 축구화는 실제로 뛰어났거든요. 진정성을 갖춘 것은 물론 아름답기까지 했어요. 선수들은 그 축구화를 신고 싶어 안달이 났었죠.”
나이키는 첫 해 생산량을 약 20,000켤레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연말까지 판매된 수량은 8만 켤레에 달했습니다.
“축구계에 새롭게 뛰어든 만큼, 세상을 놀라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마크 필켄턴, 나이키 파크 건설 총괄

1998년 대회 기간 동안, 파리의 라르슈 드 데팡스(L’Arche de Défense)에는 약 6,500㎡ 규모의 참여형 공간인 나이키 파크가 들어섰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한가운데 조성된 공간이었죠.
그해 여름, 나이키는 브라질, 미국, 이탈리아, 나이지리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6개국 국가대표팀을 후원하며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 곳은 경기장이 아니었습니다. 파리의 아이코닉한 랜드마크 중 하나인 라르슈 드 데팡스에서 약 6,500m2의 참여형 공간인 나이키 파크가 들어섰습니다. 이곳에는 인조 잔디 경기장과 체험 프로그램, 리테일 스토어가 마련됐고, 중앙의 유리 진열장에는 브라질에서 대여한 1994년 우승 트로피가 전시됐습니다.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와 같은 축에 자리한 웅장한 건축물인 라르슈 드 데팡스 아치 위에는 머큐리얼의 초대형 모형이 설치됐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스우시 로고를 두른 모습이었습니다.
나이키 파크 건설 총괄을 맡았던 마크 필켄턴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키가 축구계에 새롭게 뛰어든 만큼, 세상을 놀라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나이키 파크에는 인조 잔디 경기장과 거대한 머큐리얼 모형, 리테일 스토어가 마련됐습니다. 중앙에는 브라질로부터 대여한 1994년 축구 대회 우승 트로피가 전시됐죠. 이는 나이키가 축구계에 당당히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그해 프랑스가 우승했고, 트로피를 들어 올린 팀은 브라질이 아니었지만, 나이키의 축구를 향한 지원은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었죠. 불과 4년 전만 해도 축구계의 이방인으로 여겨졌던 브랜드는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갖게 됐습니다.
올여름, 이 대회는 로즈볼의 뜨거웠던 7월 오후를 보낸 이후 처음으로 다시 미국에서 열립니다. 한때 나이키가 뒷전으로 여겼던 축구는 이제 회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을 차지하게 됐고, 나이키는 축구계를 움직이는 아주 강력한 존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