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나이트는 바워만의 오리지널 신발을 신어 보는 첫 번째 학생 운동선수가 되었습니다. 바워만은 1958년 8월 8일 나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이트 트레이닝 프로그램과 러닝 스케줄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추신으로 이 편지를 끝마쳤습니다. '좋은 레이싱화가 될 만한 신발이 있으면 나에게 보내다오. 개학할 때까지 완성해 주마.' 바워만은 갑피를 고무로 코팅한 흰 직물로 만든 신발을 나이트의 사이즈에 맞춰 손수 제작했습니다. “스펀지로 닦아낼 수 있는, 식탁보로 사용하는 천이었어요.” 나이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이트가 말하길, 바워만이 이 신발을 신어 볼 사람으로 자신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팀에서 가장 우수한 러너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워만 코치님은 저를 큰 부담 없이 실험 대상으로 쓸 수 있다는 걸 아셨던 거죠.”
이유야 무엇이었든, 이 젊은 러너는 어느 저녁의 연습 시간에 신발을 테스트해 보았지만 오래 신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팀원 오티스 데이비스가 시제품을 발견하고 신어 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스는 이 신발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해서 다시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데이비스는 바워만이 제작한 신발을 신고 컨퍼런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으며 1960년 올림픽 400미터 종목에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나아가 바워만은 그가 지도하는 러너들의 발 윤곽선을 그리고, 발볼을 측정하고, 긴 뒤꿈치나 가는 발목과 같은 특성을 기록해 신발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가볍고 신축성과 탄성이 뛰어난 이상적인 소재를 찾기 위해 캥거루 가죽, 벨벳, 사슴 모피, 뱀 가죽, 심지어는 물고기 껍질에 이르기까지 수십 가지의 소재를 실험해 보면서 매주 수많은 신발을 만들어 냈습니다. 시제품이 더 다듬어져 보다 신뢰성을 갖추게 되자 그는 신발 회사와 협력하고자 했으나 이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바워만은 1960년 8월 포틀랜드의 한 회사에 스파이크용 강철을 요청하면서 보낸 서신에 이렇게 썼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신발 제작 회사는 저와 같은 육상 코치가 육상화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신발은... 현재로서는 독일제 신발입니다. 이 독일제 신발의 밑창 소재는 그리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이 신발의 밑창을 교체하거나 아니면 자체적인 신발을 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갖고 있는 신발이 세계 최고의 신발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는 한 치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신발을 만들 미국의 훌륭한 신발 제작 회사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